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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유학 온 탈북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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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북동행 작성일15-02-04 17:54 조회1,4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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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유학 온 탈북대학생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고서 “아, 이제는 자유다”라고 외치며 눈물 흘렸던 게 어제인 것 같은데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과 다르게 4년이 지난 오늘에는 한국사회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생기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이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한국사회에서 정착을 하면서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1. 북한생활 - 행복과 아픔이 공존하는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입니다. 한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모친인 김정숙의 고향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또 중국과 두만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북한 사람들이 탈북 하는 주요 루트로써 유명하기도 하지요.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하다보니 겨울에는 굉장히 춥고 여름에는 건조합니다. 저는 지금도 겨울이 되면 어릴 적 추위에 고생하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얼굴은 칼 같은 바람에 터서 빨갛던 볼은 봄이 되면 검불은 색으로 변했고 매번 외출하여 집에 돌아오면 얼어붙은 발을 차가운 물에 녹이느라 고생했습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저와 동생에게 동화(솜으로 누벼서 만든 북한산 겨울신?) 한 켤레씩 사주었는데 방수가 되지 않아 눈이 오면 젖어 버리기 일쑤였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눈 오는 날이면 밖에서 노는 걸 반대하셨는데 저와 동생은 그런 어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나가곤 했습니다. 어린나이에 눈 오는걸 그냥 보면서 참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눈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타면서 춥지만 정말 행복한 겨울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직업은 의사였고 어머니는 그때 담배공장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북한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부와 명예를 대표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계층 정도의 생계는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 시기 (1996부터 극심해진 북한 식량난) 이전까지 저희 가정은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1995년부터 북한에서 파라티부스, 장티부스 등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장티부스에 감염되었습니다. 약 9개월 동안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계셨고 집에 있는 돈은 전부 아버지의 치료비에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본격적인 식량난이 시작되어 국가배급마저 끊겼습니다. 저희 가정 형편은 극도로 나빠져서 처음에는 하루 세 끼 중 두 끼는 강냉이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세끼 모두 죽으로 때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쌀알 보다는 풀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철없는 저와 동생은 맛없다고 안 먹겠다며 어머니한테 투정부리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어서 먹으라고 달래시다가 나중에는 저를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시고는 억울하다고 우는 저와 동생을 껴안고 우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배고픈 일이 잦아지니 학교 가는 것도 싫었습니다. 배고프니까 식량을 찾아다니느라 친구들은 거의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출석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그런 친구들의 집에 방문하여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학교로 데려오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향이라는 친구네 집에 찾아 갔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변 이웃한테 물어봤더니 , ‘그 집 미향이 굶어죽었소...’ 라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저는 처음으로 사람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김미향, 그 친구의 이름과 얼굴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미향이는 반에서 제일 작고 마른 아이어서 매일 놀림 받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점심 때 변또(도시락)도 안사오고 남들이 먹는 것만 계속 멍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저는 미향이의 그런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면서 밉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괴롭히기도 했는데, 언젠가 미향이가 정말 맛있어 보이는 빵을 먹고 있었는데 제가 그 빵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전 그때의 저를 아직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아마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미향이를 기억하며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굶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아직도 수많은 미향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죽고 있다는 게 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장티부스에 걸렸던 아버지는 치료 끝에 9개월 만에 드디어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너무 어려워져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유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심 끝에 어머니는 중국행을 택하셨습니다. 처음에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셨는데 나중에는 ‘그래,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으니, 너희라도 가서 잘 살아...’라며 저와 저희 어머니가 중국으로 가는 것을 동의하셨고 자신과 동생은 북한에 남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 네 식구는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2. 중국생활-네 번의 탈북과 세 번의 북송, 그리고 대한민국

 

  1998년 12월, 어머니는 10살 된 어린 저만 데리고 중국으로 탈북 하였습니다. 중국에 도착하여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았지만 자신들도 살기 어렵다며 거절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인신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통해 시집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하북성에 있는 정말 깊은 산골로 시집을 갔는데 문화수준은 북한보다 더 뒤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제가 도망갈까 봐 하루 종일 감시하고 심지어 밭에서 일하는 것 까지 감시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북송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랐습니다. 1년2개월 만에 어머니와 저는 드디어 북송되었는데 중국 공안에게 두려움보다는 감사함이 더 앞섰습니다.

  그때가 2000년 2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남북한정상회담 때문에 김정일의 특별배려가 내려져 집결소(탈북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수용소)에 있는 탈북자들을 모두 무죄로 석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도 신의주 집결소에서 약 한 달간 고생하다가 무죄로 석방되어 회령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보니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낳았고 북한 사정은 더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이모네 집에 약 일주일간 머물다가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또 다시 탈북 하였습니다.

  두 번째 탈북 하여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좋은 새 아빠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저도 중국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중국말을 굉장히 빨리 배웠고 글도 빨리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꿈이 있어서 열심히 공부했다기보다는 중국 아이들에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가끔씩 놀려주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런 친구들에게 ‘나는 가난한 나라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나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야’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으니까요.

  두 번째 탈북이후 중국에서 약 6년간 살았는데 그동안 3번을 더 북송 당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탈북- 북송과정을 이 지면을 통해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제가 ‘북한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입니다. 구타와 욕설은 기본이고 영아살해까지 마다하지 않는 북한정권의 악한 모습을 저는 톡톡히 보았으니까요. 더 안타까운 것은 매번 북송당할 때마가 북한의 실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사람들의 모습은 똑같았고 전체 사회가 정체되어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006년 겨울 방학 어느 날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거절했습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중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중국의 반한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서인지 모르겠으나 한국이 싫었습니다. 또 한국행을 시도하다 북송당하면 바로 공개처형을 당하기 때문에 떠나기는 것이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한국에 가면 국적도 주고 대학교도 갈 수 있단다...’ 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저는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정말 대학에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국적이 없어 중국에서는 대학으로 진학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교에 갈 수 만 있다면 한번 목숨 걸고 도전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저는 한국행을 결심하여 떠났는데 장장 14시간 동안 몽골 사막에서 헤매다가 여러 힘든 과정을 거쳐서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5만원...’이라는 노래가사도 있듯이 참으로 가까운 거리인데 여기저기 에돌아서 오다보니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 38선을 사이에 두고 이남과 이북이 어쩌면 이렇게도 상반된 사회상이 있을 수 있는지 ...때로는 믿기조차 어렵습니다.

 

 

3. 한국생활-중3편입에서 대입 검정고시까지

 

  하나원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반학교로 진학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루빨리 한국친구들을 만나서 언어와 문화를 배워 진정한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계획은 입학 상담 첫 날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18살이었으므로 저는 적어도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되어 공부하고 싶었는데 교육청에서는 저의 북한에서의 학력이 인민학교(초등학교) 2학년까지 이므로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중학교3학년까지 다녔기 때문에 이러한 학력 조정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화성시 교육청에 3번이나 찾아가서 항의? 하였지요. 그런 제가 대견해서인지 아니면 귀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청에서 저를 중학교3학년에 편입시켜 주었습니다.

  등교 첫 날 교장 선생님께서 학교 정문에서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교무실로 데려가 선생님들에게 ‘이 학생은 북한에서 온 학생입니다. 앞으로 잘 돌봐주세요..’라며 저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담임선생님도 교복을 주시면서 앞으로 학교생활을 잘 해보자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아침 조회시간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이 제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른 반 학생들까지 왔습니다. “이름이 뭐야?”, “중국에서 얼마나 살았어?” 등등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보다 2살이나 많아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제 동생 같아서 귀엽기도 했습니다.

  비록 한 학기 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영어와 수학은 중국과 거의 비슷해서 큰 문제가 없었는데 국어와 국사, 특히 사회시간만 되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한국말이 매우 서툴고 한글보다 한자가 더 편할 때였으니까요.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 어느 날 아침조회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국사, 사회 문제집을 건네주시면서 ‘이걸로 하면 도움이 될거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제집 덕분에 제가 중간고사 때 국사를 90점 받았고 어려웠던 사회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반 친구들도 너무 잘 챙겨주어서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점심 급식시간에 항상 챙겨주고 저한테 없는 교과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해주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특히 제 짝꿍이었던 주은이 에게 제일 감사합니다. 제가 모르는 걸 물어보면 언제나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틀리게 사용하는 용어가 있으며 바로바로 수정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주은이와 함께 보냈던 짝꿍시절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항상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화적인 벽을 많이 느꼈는데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이야기나 놀러갔던 이야기를 하면 저는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연예인이야기를 하면 저는 완전히 소위 말하는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인터넷으로 뜨는 연예인들의 리스트를 뽑아 그들의 얼굴을 익히고 특징과 부른 노래 , 데뷔작 등을 외웠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뭐하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지식이 쌓이면서 친구들의 이야기에도 낄 수 있게 되었고 친구들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중3 졸업식을 맞이하면서 서로에게 롤링 페이퍼를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의 페이퍼에 ‘북한에서 온 친구 같은 누나...’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저는 반 친구들이 제가 북한에서 온 것을 모르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아무도 저한테 북한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북한에 대해서 물어보면 제가 불편해 할까봐 배려 해 준 것에 너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더 많은 중, 고등학교학생들이 북한에 대해서 알고 관심을 가지길 바라니까요. 물어보면 정말 잘 설명해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기회를 놓여서 아쉽기만 합니다.

  중3을 마치면서 저는 검정고시준비와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갈등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무조건 일반 고등학교로 가야 한다며 근처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를 추천해주셨고 필요한 서류까지 모두 준비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나이에 맞게 대학교에 입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공부를 하면서 적응하는 것도 좋지만 사회경험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배우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입학을 취소하고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였고 2007년 8월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것을 많이 후회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동기들이 정말 많았고 두, 세 살 정도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면 3년 동안 기초 실력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을거고 고등학교 동창들도 많이 생겼을텐데. 대학동기들이 고등학교 동창회를 할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짧은 일반학교 경험으로 선생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탈북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선생님들이 관심을 가지시겠지만 정말로 탈북청소년들의 입장에서 관심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탈북자, 특히 탈북청소년들에 대해서 잘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선생님들과 탈북청소년들이 만나고 이해하는 자리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4. 대학생활-탈북대학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저는 08학번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로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중국어 실력을 키워서 중국어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클럽정모부터 시작하여 새내기 OT까지 모든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학회와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나름 알찬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것이 참으로 괴로웠고 친구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탈북자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중국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나중에는 강원도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한 같은 탈북자 친구들을 피했습니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왠지 적응에 방해가 되는 것 같고 심지어 나중에는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완벽한 “한국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다. 

  스스로를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중국사람”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의 청소년 시기 전부를 중국에서 보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일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우연히 한 “탈북자”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탈북청년들은 한국에 유학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발전된 문화와 제도를 배워서 나중에 북한 사회를 재건하는데 헌신해야 하고 항상 북한을 위해 고민하고 지금 남아있는 부모형제들을 위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 선배의 말은 저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저의 생각과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북한에서 유학 온 대학생’이라고 칭하며 정체성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러니 ‘탈북자’라는 신분이 오히려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한국친구들을 만날 때 내가 겪은 북한사회를 이야기 해주고 그 곳에도 똑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을 향한 비전과 사명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저는 북한이 왜 저렇게 가난 할 수밖에 없는지를 몰랐고 북한의 실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앞으로 제가 북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꿈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앞으로 “북한을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 할 것입니다. 이 꿈을 위해 저는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에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하여 저의 전공을 “중국어학”에서 “정치외교”로 바꾸었습니다. 중국어를 전공하면 저는 좋은 학점을 받으면서 대학4년을 편하게 보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취업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꿈을 이루는 데는 “정치외교”라는 전공이 더 도움이 되고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붙잡아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 그리고 당당한 탈북대학생으로서 매일매일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로 인해 북한과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한국 친구들을 보면 왠지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탈북청소년들의 적응을 돕는데 저와 같은 탈북자 선배들의 사랑과 관심도 필요하지만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사랑과 한국친국들의 배려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리고 통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과 탈북자의 만남으로도 우리는 이미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남북한 사람들, 특히 남북한 청소년들이 함께 살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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